파리 제 19구역에는 쇼팽이 폴란드에서 파리로 넘어올 무렵에 지어진, 낡은 아파트가 있었다. 그곳은, 가난하거나,이제 막 시작하려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아주 싼값으로 방을 빌려주는 곳이었다. 낭만적인 파리 사람들은 그곳을 "예술가들의 아지트" 라고 불렀다.
조르주 마르틴은 그곳에 사는 몇명의 예술가들중 하나였다. 20대 후반의, 새까만 머리에 작지만 균형잡힌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화가. 그의 방 안에는 여러가지 크기의 캔버스와, 여러가지 크기와 재질의 붓과, 기름과 유화물감과,이젤같은 미술도구들이 가득 차있었다.
이젤에는 100호 크기의 캔버스에, 차가운 겨울밤 하늘이 뭉게진듯 그려져 있었다. 그는 셔츠에 바지만 입은체 앞치마를 두르고 붓을 집어들었다. 뭉게진 겨울밤 하늘에 뭉게진 별이 그려지고, 뭉게진 초승달이 그려졌다. 가지에 겨울 밤이 내려앉은 뭉게진 느티나무가 그려지고, 어깨에 숄을 두르고 흰 옷을 입은,아름답지만 형체가 뭉게진 금발의 소녀가 그려졌다. 조르주는 소매에 물감이 묻는것도 모른체, 그림에 열중했다. 옆집에서 무언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을때야, 조르주의 의식은 캔버스에서 빠져나왔다.
누가 이사를 오나. 조르주는 붓을 내려두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건을 옮기느냐 덜컹거리는 소리 틈으로 조심하세요,하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고, 경쾌하게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옥스포드 화 소리도 들렸다. (조르주는 굽 부딪히는 소리만 듣고도 신발을 구별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경쾌한 소리가 그치자, 굵직한 목소리가 다 됐습니다. 라고 대꾸했다.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만족스러움이 흠뻑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달칵달칵,하고 마룻바닥에 신발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잠시 들리고,의자를 끌어다 앉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침묵. 이윽고, 쇼팽의 에튀드 중 한곡이 벽을 뚫고 들려왔다.
조르주는 지금 이상황이 연극의 한 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의 옆집에 음악가가 이사 오고, 그는 오자마자 쇼팽을 연주한다. 극작가인 친구에게 얘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르주는 음악소리에 이끌려 옆집으로 찾아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네! 하고 싹싹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다시 달칵달칵하는 경쾌한 굽소리가 들렸다. 하나,둘,셋. 조르주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에 문이 벌컥 열렸다.
잘맞는 트위드 정장 차림의 앳된 소년이 웃고 있었다. 누구신가요? 소년이 물었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에 둥근 눈매의 미소년. 조르주는 오스카 와일드가 표현했던 도리언 그레이가 이런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세요?"
소년이 물었다. 조르주는 환상속에서 깨어난듯 몽롱한 눈을 깜박였다. 환상이 아니었나. 소년은 눈앞에 그대로 있었다.
"옆집 사는사람. "
조르주 마르틴, 조르주는 짧게 자기소개를 하며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세상에,그럼 제 옆집에 화가분이 사시는거군요, 아이 좋아라! 소년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러면서 자기방을 구경 시켜주겠노라고 조르주의 옷 소매를 잡고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테오도르 뒤랑이에요, 열아홉살이고 몇주전에 음악학교를 졸업했어요."
화가분이 제 옆집에 사신다니 너무 좋아요, 나중에 화실 구경 시켜주실수 있으신가요? 조르주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테오도르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뭐 듣고 싶으신거 있으세요? 말씀만 하세요! 짐정리가 좀 덜되었지만 악보는 따로 빼놓았으니까요! 테오도르는 상자에서 악보를 꺼내 늘어놓았다. 베토벤,바흐,쇼팽 슈만 브람스.. 악보를 유심히 쳐다보던 조르주는 악보를 하나 집어들었다. 이거 쳐줄수 있나요, 자기보다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조르주는 그에게 존댓말을 해야할것 같았다.
어,이거 제가 제일 자신 있는건데 어떻게 아셨어요? 테오도르는 악보를 받아들고 웃는다. 쇼팽의 발라드 1번. 그의 손이 건반을 가만히 쓰다듬기 시작했고, 조르주는 피아노 옆에 가만히 기대어 그의 연주를 들었다.
조르주는 문득, 자신의 그림속 소녀를 이 소년으로 바꿔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연우형, 14일날 시간 있어요? 사샤에게 온 문자를 빤히 쳐다보던 연우는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 답장은 금방왔다.
[14일은 애지씨랑 같이 보내야하는거 아닌가요.]
[연우형, 저 좀 도와달란 얘기에요.]
[도와 달라고요?]
[전화로 얘기할게요, 문자로 설명하기엔 너무 길어서요.]
바로 전화가 왔다. 사샤는 마음이 급했는지 영어도 아닌 폴란드어로 추정되는 언어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으나 연우는 도통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연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사샤를 진정시켰다.
[사샤씨, 영어로 또박또박 말해봐요. 뭔소리하는지 하나도 못알아듣겠다고요.]
[아, 진짜...천천히 말할테니까 잘 들어줘요.]
영어로 열심히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사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연우는 카트를 타던 어린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은 생각이 들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일단 편지부터 써봐요. 사샤는 연우의 제안을 받아들여 초콜릿을 사면서 편지지를 한묶음 샀다.고백할때 카드에 부끄러워하며 몇자 끄적였던게 생각이 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여기다가 또 뭐라고 써야하는거지..사샤는 책상위에 엎어졌다. 아, 많이 좋아하는데 표현할수가 없다니.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 영어공부좀 열심히 할걸. 사샤는 자기의 저주받은 어휘력을 욕하며 편지지 위에 연필을 굴렸다. 연우형한테 어떻게 쓸지 물어볼까. 라는 생각을 하던 그는 연우가 러브레터는 자기가 써야하는거라고,자기는 도와주지 않을거라고 말했던걸 떠올리고 다시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으아,어쩌지.."
지우개자국만 무성한 빈 편지지가 뭐라도 써달라는듯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사샤는 뭔가를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좋아해? 사랑해? 아냐 너무 상투적이야. 잠시 고민하던 사샤는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였다. 잠시후,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성스럽게 편지지를 접어 편지봉투에 넣고 풀을 칠해 입구를 봉했다. 아 부끄러워!!!!!! 편지를 입고 나갈 옷에 잘 넣어두고 침대로 몸을 날린 사샤는 부끄럽다며 이불과 베게를 마구 괴롭혔다. 으으.. 애지가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사샤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체 잠에 빠져들었다.
3.
"잘 못 잔 얼굴이네."
밤새 앓던데, 괜찮아? 애지는 사샤의 앞머리를 걷고 이마에 살짝 손을 얹으며 물었다. 그냥 잠꼬대 했나봐.워낙 잠버릇이 나쁘잖아. 사샤는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 어젯밤에 별 걱정을 다 하고 잠을 잤더니 차이는 꿈을 꿔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아 입맛도 없었다.애지가 버터바른 토스트를 우물거리면서 먹는데도, 사샤는 거기에 손도 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그래?"
"입맛이 없어서."
어디 아픈거 맞는것 같은데.애지는 다시 사샤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머리 아파? 아님 배탈?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차이는 꿈을 꿨어,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차타고 달리다가 바퀴 빠져서 죽는 꿈을 꿨어."
"저런."
그래서 아침부터 표정이 안좋았구나. 괜찮아. 애지는 살짝 웃으며 손을 뻗어 사샤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으응, 그냥 꿈일뿐이었으니까.그제서야 사샤도 토스트 한쪽을 꺠물었다.
"아침먹고 드라이브나 갈까?"
"와, 좋아. 운전 내가 해도 돼?"
"물론."
신난다! 사샤는 토스트 한쪽을 황급히 씹어 삼키며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나참,아직 어린애라니까.애지는 슬쩍 웃으며 자신다 나갈 준비를 했다.
애지가 나오기전에 서둘러 차 트렁크를 열어 어제 샀던 장미 꽃다발과 초콜렛을 꺼냈다.(다행히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초콜렛은 온전했다.) 어제 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갔었던건 정말 신의 한수였다고 사샤는 혼자서 생각했다. 애지가 언제 나오려나. 꽃다발에서 풍겨나오는 달콤한 장미향을 맡으며, 사샤는 애지를 기다렸다. 사샤- 저 멀리서 갈색 코트를 입은 애지가 차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애지를 보며, 사샤는 꽃다발을 내밀었다.마치 고백했었을때처럼, 그꽃다발 안에는 예쁜 편지봉투가 들어있었다.
"My Valentain, This is for you."
"와아, 이게 뭐야?"
사샤의 손에 들린 화사한 꽃을 보고 애지는 감탄했다. 사샤는 한품가득 그에게 꽃을 들려주고, 이마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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